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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그르/들라크루아/프랑스 화가]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사의 두 거장, 앵그르vs들라크루아

오랜 세월에 걸쳐 라이벌로 불려 온 사람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두 가지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작품 안 혹은 인물의 전 생애에 걸쳐 유사성이 많은 경우, 반대로 오늘 살펴 볼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처럼 서로 상반된 특성을 지닌 경우이지요.

[좌: 앵그르, 우: 들라크루아]

신고전주의의 마지막 주자였던 앵그르. 그리고 혁명처럼 떠오르던 낭만주자의 선두주자 들라크루아. 오늘은 19세기 미술사의 대표적인 라이벌이었던 이 두 사람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신고전주의의 마지막 대가,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좌: 터키 목욕탕(1859), 우: 샘(1856)]

19세기 프랑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손꼽히는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는 고전파의 회화를 완성한 대가로, 18세기 후반 고전주의학파의 주류 화가였던 다비드(J.L David)에게 일찍이 그 재능을 인정받았습니다. 앵그르는 초상화는 물론 역사화와 나체화에서도 빼어난 감각을 선보이며 '샘', '터키 목욕탕' 등 19세기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불멸의 명작들을 남기기도 했는데요.

[좌: 루이 13세의 맹세(1824), 우: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1808)]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로마 유학길에 올라 그 곳에서 18년간 체재하며 고전을 연구했던 그는  1824년에 프랑스로 돌아와 발표한 '루이 13세의 맹세 (The Vow Of Louis XIII)' 로 화단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고전파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 합니다.

[오달리스크(1814)]

앵그르는 스승이었던 다비드의 고전주의를 더욱 발전시키면서도 그 안에서 고전주의 특유의 차가움과 인위적인 느낌에 따뜻함을 더하여 인간적이고 우아하며 독특한 그만의 화풍을 완성시켰는데요. 가난한 평민 집안의 이름 없는 미술가였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작품만큼은 고급스러움의 극치였습니다. 특히나 감각을 자극하는 몽환적이고 섬세한 텍스쳐의 표현 능력은 그의 작품이 직선적이라며 비판했던 라이벌 들라크루아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고 합니다.

낭만주의 회화의 탄생. 페르디낭 빅토르 외젠 들라크루아(Ferdinand Victor Eugène Delacroix)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들라크루아는 고전주의 다비드 화풍에 도전하여 낭만주의 회화를 부흥시킨 장본인입니다. 명문가 외교관의 아들, 넘치는 열정과 상상력을 지녔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작품 생산에만 열중하여 1만 2천여점에 이르는 작품을 남긴 화가. 이러한 수식어들은 그가 추구했던 낭만주의와 만나면서 신비감을 더해주는데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1822)]

24세 때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라는 작품으로 살롱에 입성하게 된 그는 당시 주류 화풍과는 너무도 다른 스타일 때문에 심사자들에게 혐오의 눈길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섬세한 붓터치와 격정적인 표현, 무엇보다 드로잉 중심이던 고전주의 화풍에 대비되는 색채 위주의 표현으로 그의 낭만주의는 점차 견고해져갔고, 파리의 살롱전에서는 본격적으로 ‘형태냐 색채냐’에 대한 논쟁이 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

‘회화의 학살’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던 '키오스 섬의 학살'을 시작으로 낭만주의 회화를 한층 더 성숙시켜나간 그는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같은 대작을 포함하여 '알제리의 여인들(1834)'과 같은 동양풍의 풍속화와 초상화, 그리고 '파우스트 석판화집(1827)' 등 석판화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걸작을 남겼습니다.

ism 안에 숨어있던 또 다른 ism

사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는 한 나무에서 갈라져 나온 각기 다른 가지와도 같은 느낌으로, 한 세기동안 동행해 온 이 두 가지 사조를 완벽하게 분리해내서 생각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데요. 낭만주의 회화의 대표주자인 들라크루아에게도 고전주의적 성향은 분명 존재했으며,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앵그르에게도 낭만주의적 성향은 항상 존재했습니다.

[오달리스크와 노예 (1842)]

앵그르는 들라크루아의 화풍을 경멸하면서도 늘 자신 안에 존재하는 낭만적인 본능에 끝없이 갈등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그의 화풍을 ‘낭만적 고전주의’라 부를 정도로 작품 곳곳에서 낭만주의의 감각을 찾아볼 수가 있는데요.

[알제리의 여인들(1834)]

반면 들라크루아는 낭만주의와 직결되는 모든 부정적 이미지를 경멸하였습니다. 때문에 당시 낭만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함께 언급되던 연습 부족, 방탕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항상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여 작품을 완성해냈지요.

19세기 미술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희대의 라이벌. 하지만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라는, 자못 추상적인 개념으로 이 두 사람을 분류해 버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부질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굳이 어느 한 쪽을 선택하기보다는 미술사에 이러한 거장들이 있었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문화적으로 더욱 풍족해졌음에 감사하는 것이 두 거장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