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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과학자/퀴리부인] 이민자 여성 출신 최초, 팡테옹에 묻힌 과학자 퀴리부인


프랑스 국립묘지 팡테옹(Pantheon)은 국가에 공헌한 위인이 묻히는 국립묘지로, 이들을 애도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프랑스 명소입니다. 남성이며 프랑스 출신의 위인이 아니면 안장될 수 없던 이 팡테옹에 1995년, 한 여성의 시신이 이장되며 많은 화제를 일으켰는데요. 그 주인공은 바로 편견을 물리치고 순수한 학문적 열정으로서 팡테옹에 안장된 폴란드 출신의 이민자 퀴리 부인입니다.

Life story, Part 1 – 폴란드, 소르본 대학, 피에르 퀴리


퀴리부인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위대한 과학자 정도로 그치겠지만,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시련과 편견에 싸워왔던 흔적들이 남아있습니다. 러시아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폴란드, 여성에게는 대학 교육의 기회가 없던 정책, 가난한 가정 등 공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녀로서는 넘어서야 할 한계와 벽이 많았습니다.


[사진 출처: http://www.nobelprize.org]


여성의 대학진학을 허가하지 않았던 폴란드 정책으로 인해 프랑스로의 유학을 꿈꿔왔으나 유학갈 만큼 넉넉하지 못했던 가정 형편으로 인해 그녀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등의 허드렛일을 하며 마침내 어렵게 파리, 소르본 대학에 입학하게 됩니다.
남학생의 수가 현저하게 높았던 당시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그녀는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여성 최초 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그곳에서 자신의 동반자가 될 남자 피에르 퀴리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그녀에게 학문적 동지이자, 학문의 지표가 되어 주며, 자신들의 연구주제와 학문이 인류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함께합니다. 이렇게 학문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와 연구 끝에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이라는 첫 영예를 떠안게 됩니다.



피에르 퀴리는 라듐이라는 원소를 함께 발견하여 노벨상의 영예를 안겨주었지만 그녀에게 큰 아픔을 주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 까닭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그녀의 곁을 떠났기 때문인데요. 자신의 반쪽을 잃은 퀴리 부인은 남편 피에르의 자리를 뒤이어 소르본 대학의 최초 여자 교수로 임용되며 또 다른 출발을 맞이하게 됩니다.


Life story, Part 2 – “어쨌든 계속되어야 한다.”


퀴리부인에 대해서 가장 높게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뛰어난 학식이 아니라 학문에 대한 꾸준한 지구력 그리고 욕심 없는 순수함을 들 수 있습니다. 이방인으로서 프랑스 학계에, 그것도 여성으로 남편의 지원 없이 들어선다는 것은 학문을 통한 자신의 가진 시대적 사명감이 없이는 감당치 못할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 된 퀴리부인이 마주한 세상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외부적, 내부적으로 복잡한 상황이었던 그녀는 그럴수록 연구가 세상에 어떻게 보탬이 될 것인지에 대해 몰입하며 집중을 가했는데요. 그것은 남편이 원하는 바였고, 그녀가 남편과 함께 걸어왔던 학문의 자세였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함께하던 연구를 뒤이어 시작한 퀴리부인은 마침내 성공적으로 라듐을 분리해 내는 것을 시작으로 방사성 물질을 계속하여 연구하면서 본격적으로 실험의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그녀는 오직 본인의 힘과 노력으로 1911년 노벨 화학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는데요. 마침내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장애물을 스스로 극복하게 됩니다.


많은 날을 연구에 매진하면서 방사능에 오랫동안 노출되었던 퀴리부인은 결국 67세에 백혈병으로 숨을 거두고 맙니다. 하지만 그녀가 열정을 다하여 매진하여 연구한 결과, 현대 문명은 큰 혜택을 받게 되었는데요. 학문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자세, 무엇보다도 그 학문에 대한 사회적 역할과 쓰임에 대한 고민이 뒷받침되어있었기에 그녀의 헌신적인 연구가 오늘날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