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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에펠탑/프랑스 건축가] 프랑스의 상징을 건축한 ‘철의 마법사’ 구스타브 에펠

중국의 만리장성,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호주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 등 나라별로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축물이 존재하죠. 프랑스에도 역시 상징적인 건축물이 존재하는데요. 베르사유의 궁전, 개선문등 많은 건축물이 존재하지만 프랑스하면 단연 에펠탑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모험과 실험정신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프랑스의 상징이자 파리 최고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은 에펠탑은 없었을 텐데요. 에펠탑을 건축한 프랑스 최고의 건축가, 그 주인공은 구스타브 에펠입니다.


모험하는 건축가, 에펠



높이 300m, 7300톤에 육박하는 엄청난 크기의 철제건축물 에펠탑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건축가 구스타브 에펠의 이름에서 따온것입니다. 건설비는 총 800만 프랑, 하지만 국가에서 최대 지급받은 금액은 150만 프랑뿐이었던 것으로 보아 시공 자체가 모험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텐데요. 당시 에펠은 국가에서 지원받은 150만 프랑을 제외한 시공비 전부를 스스로 지불하고, 대신 입장료와 수익을 회사에서 거두는 조건으로 2년 2개월의 긴 건축에 돌입합니다.

에펠탑 건축은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프랑스 정부에서 단순한 볼거리 제공을 목적으로 300m의 철탑 설계를 의뢰한 것에서 출발합니다. 수많은 공모작 중에서 프랑스 정부로부터 선택 받은 것이 바로 철교 건설의 전문가였던 구스타브 에펠의 작품이었는데요. 반대 여론이 거셌던 당시, 대중에게 어떠한 반응을 얻을 수 있을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공한다는 것은 약간 무모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재료 없이 오직 철로만 시공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시비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그뿐 아니라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반드시 쓰러질 것이라고 비관적인 예측 역시 난무해, 그의 건축할 당시 전문 건축자들의 지원이 유달리 적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건축에는 곡예사 등 비전문자들이 동참되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위험한 공사 중 인명 사고 한번 없이 안전하게 공사는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수 많은 비관론 속에서도 건축을 감행한 그의 무모함은 오히려 에펠 스스로가 자신의 건축물에 대해 가지는 자신감처럼 비쳐지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에펠탑은 반대 여론까지 모두 흡수하여 최고의 찬사를 받는 역사적인 건축물이 됩니다. 150만 프랑의 적은 지원금으로 어려운 공사였지만, 시공비를 훌쩍 뛰어넘는 수익을 거두는데요. 인류가 하늘을 향해 높은 탑을 쌓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 높이를 확장하는 것이 아닌 중력에 대한 저항이자 한계를 뛰어넘는 최고의 도전을 의미합니다. 이를 계기로 구스타브 에펠은 철의 마법사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었으며 그의 건축물 에펠탑은 철제탑으로서 산업화 시대의 시작이라는 시대적 사명과 의미를 부여 받게 됩니다.

그의 건축을 완성해준 영감의 원천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로운 발상을 가진 그는 아주 평범한 집안에서 평범한 두뇌를 소유한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학교의 주입식 교육으로 인해 적응하지 못했고 성적에도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학구적인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에펠의 삼촌을 비롯한 지인들과 나누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의 토론과 자발적인 학습을 실행해 왔는데요. 이러한 실행은 그를 그 어떤 학습 스케줄 보다 훨씬 창의적으로 키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를 본격적인 철제 전문 건축가로 키운 것은 22살에 방문한 만국박람회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알렉상드로 바로의 ‘산업의 궁전’이 바로 그의 촉수를 발동시킨 것인데요. 철제 건축에 큰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게 된 그는 본격적으로 주철 공장에 들어가 자발적으로 일을 추진하고 고민하며 자신의 길을 개척해 갑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철교들과 철제 건축에 자신의 입지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프랑스는 물론 세계 곳곳에 자신의 철제 기술력을 동원한 건축물을 지어가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미국 뉴욕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상이 있습니다.


구스타브 에펠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재능을 꼽는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것은 아마 철을 통해 시대를 내다본 선구적인 감각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19세기 말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하는 그때 우연히 만나게 된 ‘산업의 궁전’은 그의 인생 속 최고의 행운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분야에서 무섭게 파고들며 노력하는 그의 열정이라는 밑거름이 그를 최고의 건축가로 자리하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