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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뤼크 고다르/안나카리나/프랑스영화배우] 예술적 영감을 뜨겁게 불태운 영화감독과 그들의 뮤즈

우리는 흔히 예술에 영감을 주는 여성들을 ‘뮤즈’라 칭합니다. 예술의 분야와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존재해 온 그녀들은 때로는 영감의 원천으로, 때로는 숭고한 구원자의 모습으로 예술가들의 곁에 머물렀습니다. 특히 영화감독들에게 있어 뮤즈는 주로 그들과 함께 작업한 여배우인 경우가 많았는데요. 밀라 요보비치와 폴 W.S. 앤더슨, 케이트 베킨세일과 렌 와이즈먼, 팀 버튼과 헬레나 본햄 카터 등 잘 알려진 감독과 여배우 커플만 해도 상당수.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위대한 영향을 끼친 감독-여배우 커플 중 가장 대표적인 두 커플을 소개하겠습니다.


누벨 바그의 거장 장뤼크 고다르 & 여신 안나 카리나



프랑스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 영화계에까지 영향을 끼친 누벨 바그(nouvelle vague, new wave) 운동은 신선한 발상과 새로운 표현 방식 등으로 영화계에 완전히 새로운 풍조를 몰고 왔습니다.  누벨 바그 운동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을 꼽을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인물이 바로 세계적 거장 장뤼크 고다르 (Jean-Luc Godard)인데요. 영화 <네 멋대로 해라(1960)> , <여자는 여자다(1961)> , <미치광이 피에로(1965)> 등을 통해 프랑스 누벨 바그 영화의 진수를 보여준 그의 뮤즈는 ‘누벨바그의 여신’으로 불리는 안나 카리나였습니다. 덕분에 오늘날에도 ‘누벨 바그’라는 단어 뒤에는 이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곤 하죠.


덴마크 출신이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프렌치 시크의 아이콘으로 손꼽힐 만큼 너무나 ‘프랑스적인’ 여배우였던 그녀. 고다르의 초기 영화에서 그녀를 제외하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영화에 있어 그녀의 비중은 남다른 것이었습니다. 또한, 누벨 바그 영화의 전성기가 곧 그녀의 전성기였을 만큼 영화 속에서 절대적인 존재감을 나타냈죠.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장뤼크 고다르의 편지 한 통 덕분이었습니다. 안나 카리나가 출연한 한 비누 광고 이미지를 보고 그녀의 모습에 매혹된 장뤼크 고다르는 자신의 첫 작품인 <네 멋대로 해라(1960)>에 그녀를 캐스팅하기 위해 편지를 보냈는데요. 안나 카리나는 노출을 해야 한다는 말에 출연을 고사했지만, 곧 그의 다음 작품인 <여자는 여자다(1961)>에 출연하게 되며 두 사람의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고다르의 꾸준한 구애로 단순한 감독과 배우의 관계를 넘어 연인 사이로 발전한 두 사람은 짧았지만 강렬했던 결혼 생활을 거치며 많은 작품을 함께했습니다. 안나 카리나는 고다르의 영화 인생에서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던 시기에 뮤즈 이상의 존재감으로 그의 곁에 함께했으며, 작품 속에서 단순히 아름다운 매력을 뛰어넘는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매력을 선보였습니다. 그녀의 표정은 감독이자 연인인 고다르의 애정 어린 시선을 거쳐 더욱 풍부해졌으며, 복잡다단한 감정선 역시 세련된 영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습니다.

이혼 후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각자의 작품 활동에 매진하며 왕성한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두고두고 회자되는 것은 역시 함께 했던 시절의 작품인데요. 감독과 배우, 남편과 아내, 예술인과 뮤즈 등의 관계로 함께한 시간이 낳은 주옥같은 산물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LOVE is all I need – 잉그리드 버그만과 로베르토 로셀리니


가장 영화적이며 가장 비극적이고 어쩌면 가장 위대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 감독과 여배우 커플을 꼽아보자면 잉그리드 버그만과 로베르토 로셀리니 커플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영화 <카사블랑카(1942)>,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의 히로인으로도 잘 알려진 잉그리드 버그만은 이론의 여지 없는 1940년대 헐리웃 최고 여배우였습니다.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여주인공 마리아가 로버트와 첫 키스를 나눌 때, 화장기 없는 청순한 민낯으로 “Where do the noses go? I always wondered where the noses would go.” 같은 순수함이 묻어나는 대사를 읊는 그녀의 모습에 관객들은 열광할 수밖에 없었죠.


이후 영화 <가스등(1944)>에서 남편에게 정신병자로 몰리는 비련의 상속녀 연기를 훌륭하게 소화, 마침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손에 넣으며 승승장구하던 그녀는 한 편의 영화로 인해 격정적인 사랑을 얻고, 다른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녀를 사랑의 늪에 빠트린 영화는 바로 이탈리아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인데요. 영화에 큰 감명을 받은 그녀는 이후 그의 또 다른 작품인 <전화의 저쪽>을 보고 난 후, 그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영화 두 편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배우가 필요하다면 당장 달려가 함께하겠어요.
제가 아는 이탈리아 말은 Tiamo(사랑해요) 뿐이지만요.


세기의 스캔들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은 당시 그녀가 남편과 딸이 있는 유부녀였다는 것. 그리고 로셀리니 감독 역시 별거 중인 부인이 있는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이었죠. 잉그리드 버그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이탈리아로 향했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세간의 싸늘한 시선과 공개적인 비난이었습니다. 그녀가 로셀리니의 아이까지 임신하게 되자 교회는 물론 미국 의회까지 나서 그녀를 ‘타락한 마녀’라고 칭하며 맹렬히 비난했는데요. 이로 인해 그녀는 7년 가까이 헐리웃에서 추방당하며 어려운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로셀리니와 함께 <스트롬볼리(1950)>를 비롯, <이탈리아 여행(1953)>, <불안(1954)> 등의 작품을 촬영하며 세간의 시선에 아랑곳 않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요. 이 때 탄생된 두 사람의 작품들은 평가 절하되어 대중과 평단의 외면을 받았으나, 지금에 와서는 새롭게 재평가 되고 있습니다. 사랑은 그들에게 후회 없는 추억을 만들어주었을 지 몰라도 경제적인 여유까지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작품의 잇단 흥행 참패 속에 그녀의 가정은 파산에 이르렀고, 결국 <아나스타샤(1956)>로 헐리웃에 복귀하여 생애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 성공적으로 재기하게 됩니다. 로셀리니와의 불 같았던 사랑도 막을 내리고 그녀는 담담하고 조용하게 인생의 2막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뮤즈로 사는 것이 좋다’고 말했던 안나 카리나. 그리고 ‘다시 태어나도 같은 삶을 살 것’이라 했던 잉그리드 버그만. 두 배우 모두 운명적인 이끌림에서 시작해서 찬란한 불꽃처럼 타오른 대표적인 뮤즈인데요. 예술가들에게 뮤즈가 존재하는 한, 오래도록 회자될 명작 역시 계속해서 탄생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