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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항공기/에어 프랑스/프랑스 다쏘 그룹] 프랑스 항공계의 마이더스 손, 마르셀 다쏘

익숙한 땅을 떠나 낯선 곳에서 맞이하는 여행은, 언제나 상상만으로도 마음을 한껏 부풀게 하는 풍경입니다. 그만큼 ‘공항’이라는 장소와 수많은 사람을 싣고 이국의 땅으로 비상하는 ‘비행기’는, ‘여행’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아이콘이 되기도 했는데요. 인류에게 불가능한 꿈처럼 여겨지던 ‘하늘을 나는 일’은 항공기의 발명, 그리고 여객기의 발명으로 기적처럼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제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일들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에어 프랑스로 유명한 프랑스의 항공기 역사 속에도 그 위대한 발명의 주인공이자 프랑스 항공계의 거장인 마르셀 다쏘가 있습니다.


창의적인 엔지니어의 ‘항공기’라는 작품



마르셀 다쏘(Marcel Dassault)는 1892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프랑스 최고의 항공기 엔지니어입니다. 수많은 항공계의 역사 속에서도 마르셀 다쏘가 유명인사로 이름을 떨치게 된 이유는, 바로 항공기 개발•생산 기업인 다쏘 그룹(Groupe Industrial Marcel Dassault : GIMD)의 시초가 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산 전투기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다쏘 그룹의 창시자인 마르셀 다쏘는, 프랑스의 명문기술학교인 리세 꽁두르세(Lycee Condorcet)를 이수하고 국립 항공우주 대학원(SUPAERO)을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깔레-뫼동 항공연구소에서 항공기 설계의 첫 발을 내딛게 되는데요. 하지만 프랑스 최초의 항공 전문 연구소이자, 프랑스 항공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었던 칼레-뫼동 항공연구소는 조금 더 실전적인 공부를 열망했던 다쏘의 열정을 모두 채워주지는 못했습니다.



책상에 앉아 학문에만 열중하는 것보다 보다 현실적이고 창의적으로 일하길 원했던 다쏘는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자유롭게 펼치기 위해 1930년, 자신의 본명인 마르셀 블록을 딴 ‘마르셀 블록’사를 설립하여 프랑스군에 항공기를 납품하기 시작했습니다. 청년시절부터 프로펠러와 항공기 설계에 관련된 많은 특허를 출원한 경력이 회사를 설립하는데 큰 힘이 되어주었지만,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습니다. 1936년, 인민전선이 정권을 잡고 마르셀 블록사를 국유화해버린 것이 그것인데요. 그 후 회사의 대표자리에서 쫓겨나 감독관이 된 마르셀 다쏘는 다시 ‘SAAMB’라는 이름의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이는 다쏘 아비아시옹(Dassault Aviacion)이라는 회사로 지금도 건재한 프랑스 최대의 군용 항공기 회사의 시초였습니다.


프랑스를 비상하게 한 항공계의 거장



다쏘는 우수한 군용기를 개발하며 발빠른 약진을 해나갔습니다. 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수용소로 끌려가는 위기에 처하기도 했는데요. 항공기 설계자로서의 재능을 내어 놓으면 비극적 운명을 피하고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안을 거부했던 다쏘는 수용소를 전전하며 강제 노동에 동원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만큼 조국에 위해 지켜온 다쏘의 재능과 능력은 매우 뛰어난 것이었는데요. 언제나 창의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메모하고 설계하며 뛰어난 항공기들을 발명해냈습니다. 비록 ‘엔지니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지만, 넘쳐나는 재능과 번뜩이는 아이디어, 개방적인 태도는 그의 빛나는 원석 같은 재능을 더욱 갈고 닦아주는 뒷받침이 되어주었는데요. 마르셀 블록 사 시절 개발한 피스톤 엔진기와 민간용 항공기 뿐만 아니라, 프랑스 최초의 실용 제트 전투기인 우라강(Ouragan)을 비롯해 최초의 소음속 전투기와 최고의 유럽 전투기인 셀로 등의 기본 설계를 개발해냈습니다.



이후 다쏘는 정계에도 진출해 원로원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고 국민의회 의원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민 드 프랑스’ 매거진과 ‘쥬르 드 프랑스’ 등 각종 매체와 미디어에 진출하며 프랑스의 최대의 자산가이자 유명인으로 이름을 떨쳤는데요. 영화 제작자와 시나리오 작가 등 다방면으로 활발히 활동을 한 다쏘는 1956년, 성공적인 전투기를 개발한 공로로 최상위 훈장인 ‘그랑 크루아’ 훈장을 받기도 하며, 기념 우표의 얼굴을 새기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항공산업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긴 다쏘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세르쥬 다쏘가 다쏘 그룹의 경영을 잇고 있지만, 그의 업적을 기리며 파리 샹젤리제 교차로가 ‘샹젤리제 마르셀 다쏘 교차로’로 개명될 정도로 프랑스라는 나라에 있어 다쏘는 커다란 업적을 남기고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었습니다.



언젠가부터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던 다양한 문명의 이기들. 그 발견과 발명의 뒤편에는 누군가의 뛰어난 재능과 용기, 또 남들보다 한 발 앞서나갈 수 있는 개방성과 창의력이 있었는데요. 단순히 한 개인의 뛰어난 재능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조국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기꺼이 헌신한 다쏘의 업적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프랑스 역사와 항공계의 업적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마르셀 다쏘. 그는 이제 없지만 우리가 누리는 엄청난 기술의 편의가 한 뛰어난 항공기 엔지니어의 작은 첫 걸음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경이롭게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