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취향을 다투는 친구에서부터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커리어까지 우리는 누군가와 라이벌관계에 놓여지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는 창의력이 무기인 예술의 세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현대의 우리들에게 거장으로 꼽히는 드높은 명성의 예술가들도 예외일수는 없습니다. 오늘 소개될 라이벌의 주인공은 돈독한 사제지간이 질투와 야망으로 인해 라이벌로 변모한 20세기 미술계의 거장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입니다.


화려한 색채, 앙리 마티스

<붉은 실내>


피카소와 더불어 20세기 거장으로 꼽히는 앙리 마티스 1869년 프랑스 북부 노르파드칼레의 르샤토캄프레시스에서 출생했습니다. 법률을 배우러 파리로 유학을 왔다가 병으로 입원했던 병실에서 가끔 그림을 그리는 옆 사람을 보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그를 화가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이때가 그의 나이 스물 한살이였죠. 당시 화가들은 사물을 정확하게 그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에 비해, 마티스는 ‘진짜처럼 보이는 그림’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주전자 그림을 보고 “와, 진짜 같아!”라는 탄성보다 “녹색 주전자 속에 푸른 숲이 담겨 있는 것 같아”라고 마음으로 느껴주길 바랬죠. 이런 그의 고집은 나무는 녹색, 바다는 파란색, 등 규범화 된 색을 과감히 이탈했고, 어울리지 않는 컬러들의 조합을 선보였습니다. 그는 ‘색채를 해방시킨 화가’ 로서 ‘야수파 화가’의 선동자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형식과 시대를 넘어선, 파블로 피카소

<지중해의 풍경>


미술에 문외한이라 할지라도 피카소의 이름은 모르는 이가 없죠. 파블로 피카소는 20세기 거장 중에 거장으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합니다. 그는 1881년 스페인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화가인데요. 15세에 이미 화가로 데뷔할 정도의 천재성을 보인 그는 나이제한에도 불구하고 마드리드의 왕립미술학교에 조기 입학했습니다. 19살이 되던 해에는 ‘학교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서’ 프랑스 파리로 건너와 유학생활을 시작하게 되죠. 친구의 죽음, 가난, 굶주림으로 그에게 가장 암울했던 ‘청색시대’와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 황홀했던 ‘장밋빛시대’를 거쳐 1907년 <아비뇽의 처녀들>을 시작으로 비로소 그만의 회화 법을 선보이게 됩니다. 이 때부터 피카소는 ‘천재화가’라는 타이틀과 함께 형식을 파괴하고 시대를 초월한 입체파 화가로써 입지를 굳히게 됩니다. 

<아비뇽의 처녀들>


거장과 천재화가, 끈끈한 사제지간

어릴 적 부 터 천재화가로 불리며 이미 15살에 화가가 된 스페인출신의 피카소는 부푼 꿈을 안고 찾은 예술의 본고지, 프랑스 파리에서 작품을 전시하게 되었습니다. 천재성을 인정받으며 조기 입학까지 불사했던 그였지만, 고향에서와는 달리 아무도 전시장을 찾는 굴욕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 때 차가운 냉대에 낙심하던 피카소의 그림을 알아준 단 한 사람이 있었는데요.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분명 천재적인 화가”라고 평해준 사람은 다름아닌 앙리 마티스 였습니다. 앙리 마티스는 이미 독자적인 화법을 선보이며 그 당시 미술계의 거장으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부터 피카소는 자기를 인정해 준 마티스를 멘토로 인정하면서 돈독한 사제지간으로 각별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냉정과 열정 사이, 질투로 얼룩진 라이벌

20세기 초 사진이 예술의 한 분야로 자리잡게 되면서 화가들은 좁아진 입지를 넓히기 위해 새로운 화법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 때 마티스는 화가의 재해석이 가미된 화법을 찾아야 한다며 ‘자신의 화법을 추종’하도록 주장했는데, 이에 피카소가 “사물의 형태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반기를 들면서 이들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미술계에서 1인자가 되고 싶은 피카소의 야망이 마티스라는 스승의 장막을 뚫고 나온 것이죠.
사실 이전부터 이 둘의 스타일은 극명하게 다른 색깔을 보였습니다. 예민하고 냉철하며 신중한 마티스에 비해 피카소는 열정적이고 직감에 의존했죠. 어쨌거나 이 시점을 계기로 둘은 대치상태에 돌입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됩니다. 마티스는 어느 것 하나도 버리지 못하는 피카소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 콜라주 작품을 쓰레기로 비하했고, 피카소는 정해진 시간에 낮잠을 자는 것조차 빼놓지 않고 계획표대로 50년 동안 빼놓지 않고 매일같이 반복해온 마티스를 경멸하며 서로를 헐뜯었죠. 이에 분노한 마티스는 ‘12살이나 어린 애송이 피카소를 다시는 보지 않겠노라’ 선언하고 그 후 10년간 단 한번도 보지 않았습니다.


서로를 향한 진실된 마음

피카소 <캘리포니아 화실>


최초로 나를 인정해준 스승, 나의 뒤를 믿고 따르는 든든한 제자의 관계에서 무려 10년간을 등을 돌린 절연의 관계가 되어버린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서로에 대한 진실한 속내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1954년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앙리 마티스는 죽음의 문턱에서 “내 그림을 피카소 그림과 함께 전시하지 말아달라. 불꽃같이 강렬하고 번득이는 그의 그림들 옆에서 내 그림들이 초라해 보이지 않게. ”라고 그를 향한 마지막 찬사를 보냈고, 피카소는 앙리마티스가 생을 마감한 후에야 “나를 괴롭혔던 마티스가 사라졌다. 나의 그림이 뼈대를 형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마티스다. 그는 나의 영원한 멘토이자 라이벌이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큰 슬픔과 자책에 빠진 피카소는 장례식장을 차마 찾지 못한 채 <캘리포니아 화실>이라는 그림을 남기는 것으로 애도를 대신했습니다. 피카소는 1973년 4월 8일 92년간의 생을 그림을 그리던 중 마감했습니다.

이름을 남긴 예술가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본의 아니게 라이벌 구도에 놓여있는 관계가 많이 있습니다. 까미유와 로댕, 고갱과 고흐, 살리에르와 모차르트…불꽃 같은 사랑이 파멸로, 끈끈한 우정이 타인으로 돌아서버린 경우도 많지만,
하나 분명한 건 서로의 열정이 식지 않도록 끊임없이 불을 지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에 이른 후에야 비로소 서로를 인정하게 된 마티스와 피카소, 이들은 라이벌임과 동시에 서로에게 든든한 동반자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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