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권력이 강력할수록 권력을 둘러싼 다양한 세력이 발생하기 마련인데요. 그래서인지 국적 불문 나라별 한 시대를 평정한 황제들에게는 수많은 여성들이 존재했습니다.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역시 그가 가진 강력한 왕권만큼이나 화려한 여성 편력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나폴레옹이 사랑하고, 또 그를 사랑했던 여인들의 이야기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보잘것없는 군인을 사랑한 여자, 데지레



마르세유 상인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막내 딸 데지레는 정치적인 것은 물론 권력에 대한 욕심조차도 없는 아주 평범한 여성입니다. 나폴레옹의 첫 약혼자이기도 한 그녀는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는데요. 작은 키에 낡고 더러운 군복까지, 가난하고 호감을 끌 만한 모습 또한 없었던 나폴레옹이었지만 데지레의 눈에는 왠지 그가 호감 있게 느껴지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일 때 만나서인지 둘은 나폴레옹이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 열렬한 사랑을 하게 되는데요. 마르세유에서 나폴레옹을 기다리던 데지레는 나폴레옹이 조세핀이라는 여성과 결혼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깊은 상처와 배신감을 얻은 데지레와 그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진 나폴레옹은 주변의 인물들에게 데지레를 1등 신붓감으로 소개하게 되고, 그렇게 만나게 된 베르나도트는 데지레를 신부로 맞이하는데요. 비록 나폴레옹과의 연을 잇지는 못했지만, 훗날 스웨덴의 국왕이 되는 베르나도트와 함께 그녀는 스웨덴의 왕비가 됩니다.

나폴레옹의 사랑, 조세핀



데지레를 마르세유에 두고 파리로 떠난 나폴레옹은 이미 두 아이의 엄마이자 자신보다 6살이나 연상이었던 여인, 조세핀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타고난 우아함과 귀족적인 분위기, 폭넓은 인간관계와 능숙한 말솜씨를 가진 그녀는 나폴레옹이 찾던 여성상과 부합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사별한 전남편으로 인해 정치적 중심에 있었던 조세핀은 나폴레옹이 파리의 온 목적에 부합하는 여성상이었고 최고의 지지자로 여길 만한 여성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처음부터 조세핀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지만, 나폴레옹의 카리스마와 또 자신에게 쏟아붓는 구애 행각에 조세핀은 차차 마음을 열게 됩니다. 나폴레옹에게 처음으로 육체적 쾌락을 느끼게 한 조세핀은 그녀와 이별한 후에도 "그녀에 대한 신뢰는 깨졌으나 자신이 가장 사랑한 여인이었다"고 밝힐만큼 나폴레옹의 마음을 깊게 사로잡았는데요. 안타까운 점은 나폴레옹이 육체적, 정신적으로도 깊이 사랑했던 여성이 조세핀이 마지막이라는 것입니다. 조세핀 이후에 맺게 되는 많은 여성과 나폴레옹의 관계는 목적과 이유를 바탕으로 지속됩니다.

의무로 받아들인 결혼, 마리 루이즈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이혼에 있어 결정적인 원인은 조세핀의 불임, 그리고 나폴레옹이 원정을 떠난 사이 바람을 피웠다는 여러 가지 정황에 인하는데요. 후대를 잇는 대의를 위해서라도 나폴레옹은 조세핀과 이혼을 결단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맞이하게 되는 여성이 바로 마리 루이즈, 나폴레옹 2세의 어머니입니다. 마리 루이즈는 당시 정세상 상당히 불안한 위치에 있었던 오스트리아의 공주였습니다. 어느 나라로 시집갈지 모르는 불안함 속에 결혼 협정서라는 서면의 결혼 합의가 이루어지고, 나폴레옹과의 갑작스러운 결혼 성립을 통보받는데요. 대외적인 성격의 조세핀과는 다르게 연약했고 나긋한 성품의 여성이었습니다.


서면으로 오고 간 정략결혼이었기에 정은 깊지 않았지만 부인을 존중하는 나폴레옹은 그녀를 아꼈는데요. 하지만 그 생활이 오래가지 못했다는 것이 한가지 흠이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몰락의 계기가 되었던 러시아 전쟁을 떠나고, 이 후 전쟁에 패배해 유배된 나폴레옹과 친정인 오스트리아에서 나이페르크 백작과 연인 사이로 발전했던 마리 루이즈는 자연스럽게 이별하게 되는데요. 마리 루이즈의 맏아들이자, 나폴레옹의 적자였던 나폴레옹 2세는 자신의 어머니는 연약한 분일 뿐 아니라, 나폴레옹의 부인으로는 적절하지 않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 둘의 관계는 정략결혼의 한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대표적인 예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세 명의 여성 외에도 나폴레옹은 수많은 여성들을 자신의 곁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성들 모두가 각각의 사연을 가지고 역사 속에 스며들었는데요. 권력과 여성의 상관관계를 재고해보게 하는 대표적인 사례임과 동시에 권력의 덧없음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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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lenzara / 추억의 소렌자라

소렌자라의 해변에서 우리 두사람은 만났어요.
어부와 그 기타가 이 부드러운 멜로디를 여름밤에 노래하고 있었지요.
소렌자라의 해변에서 매일밤 사람들은 춤을 추고 있었지요.
그리고 그대가 떠나는날.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 이제 떨어질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소렌자라에서의 행복은 얼마나 달콤했던가요.
소렌자라에서의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이토록 나를 즐겁게 해주었던 멜로디를 들을 때 나는 알게 되지요.
그날 밤 소렌자라의 한가운데서 두 사람의 사랑에 생명이 깃들었다는 것을.
여름마다 나는 또 소렌자라로 되돌아 가야지.

프랑스 샹송 중에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노래 ‘추억의 소렌자라’입니다. 국내 가수 ‘유주용’이 한국 가사를 붙여 부르기도 하였고, 경음악으로도 많이 듣는 칸소네풍의 샹송인데요. 가사 속 ‘소렌자라’는 나폴레옹이 태어난 그곳, 프랑스 코르시카섬에 위치한 해변의 이름입니다.

영웅의 탄생지

코르시카는 해발고도 2,000m를 넘는 산지가 이어지며, 1년의 반은 눈에 덮여 있는 섬으로 현재 프랑스령이긴 하지만 이슬람, 영국, 이탈리아 등의 지배를 거치면서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최근까지도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중해에 코르시카보다 거친 섬은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요, 지형뿐 아니라 문화와 역사까지 우여곡절이 많은 섬으로 이러한 거칠고 남성적인 환경이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을 탄생시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폴레옹, 그가 잠을 정복하지 못했더라면, 코르시카 섬의 어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한 CF멘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코르시카섬은 위대한 황제 나폴레옹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코르시카인들은 자신들을 프랑스인이라 생각하는걸 좋아하지 않으며 아직까지도 독립을 원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이들 중에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황제 나폴레옹이 탄생했다는 사실이 무척 아이러니합니다. 나폴레옹은 평생 코르시카인의 터프함과 솔직함을 잃지 않아, 농민출신 사병들로부터 신뢰를 받았다고 전해지는데요. 그를 향한 프랑스인들의 ‘코르시카 촌뜨기’라는 조롱이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가장 큰 자극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중해 최고의 휴양도시

프랑스어로 îls de beauté(일 드 보떼), 즉 ‘아름다운 섬’이라 불릴 만큼 천혜의 자연 경관을 가지고 있는 코르시카 섬. 세계 여러 나라의 유명 인사들이 이 곳에 자신의 별장을 갖고 있으며, 매년 바캉스 시즌이 되면 프랑스인들이 최고로 가고 싶은 여행지로 꼽는 곳이기도 하지요.
코르시카의 북쪽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많이 보존되어있지만 남쪽은 점차 세계적인 휴양지로 발전하고 있는데요. 그 중심에 코르시카의 중심지 ‘아작시오(Ajaccio)’가 있습니다. ‘아작시오’는 오래된 항구 도시이자 나폴레옹의 탄생지답게 나폴레옹 거리, 나폴레옹 광장, 나폴레옹 박물관 등이 형성되어 있으며, 곳곳에서 그의 동상을 비롯하여 이름이 들어간 가게 등을 만날 수 있답니다.
코르시카 섬에 역사적인 가치를 부여한 것이 나폴레옹이라면 휴양지의 대명사로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지중해의 깨끗한 바다일텐데요. 보석같이 투명한 바다에서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끽하며 해수욕을 즐기고 싶다면 ‘아그리아테스(Agriates)’ 해변이 제격입니다. 지중해 바다의 정석을 보여주는 듯한 찬란한 빛깔과 고운 백사장은 당장이라도 물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코르시카 최남단에 위치한 ‘보니파시오(Bonifacio)’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지요. 오랜 세월 동안 해수에 깎이며 형성된 절벽은 어딘지 모르게 고요하고 웅장한 느낌마저 자아냅니다. 그리고 절벽 위엔 어부와 선원들이 보금자리가 자리잡고 있는데요, 가파른 절벽과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 위로 지는 노을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이라고 합니다.
북쪽에도 코르시카의 매력은 숨어있습니다. 마치 주먹을 쥐고 검지만 편 형태를 띄고 있는 코르시카에서 가장 위쪽 지방을 일컫는 ‘캡 코르시카(Cap Corse)’는, 다듬어지지 않은 코르시카 본연의 모습을 아직까지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 위치한 작은 항구 도시들에는 몇몇 렌트 하우스와 소박한 분위기의 레스토랑,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가게들이 사실상 마을의 전부라고 하는데요. 여행을 할 때마저 여유를 잃고 최대한 빨리, 많은 것을 보려고 하는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슬로우 라이프를 느끼게 해 줄만한 곳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품: HG3CR01TA/가격: 618,000원]

휴양지 특유의 낭만과 여유, 그리고 세련된 아름다움이 있는 코르시카의 남쪽과 생동감 넘치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보존 되어 있는 북쪽. 이렇게 두 가지 매력이 공존하는 코르시카를 모티브로 탄생 된 루이까또즈의 Corse 라인 역시 내추럴한 젊음과 고급스러운 멋을 동시에 표현해냈습니다.
때때로 늘 똑같은 풍경들이 지겨워질 때, 이국적인 정취를 상상 하는 것만으로도 지친 일상에 활기가 돌곤 하지요.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기 전, 루이까또즈와 함께 코르시카의 아름다움을 한껏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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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뒤흔들었던 프랑스의 통치자 나폴레옹과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나폴레옹의 시대를 종식시킨 영국의 웰링턴은 각 국의 통치자이자 전략가입니다. 이 둘은 1769년 동갑내기로 각 나라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대표자이자 라이벌 관계인데요. 역사 속의 그들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폴레옹, 프랑스의 히어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변방 코르시카 출생으로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로 건너왔다가 파리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동료들과 출신이 달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화합되지 못한 채 외로운 나날을 보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고금의 모든 병법을 독파하며 충실한 학교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네트워크와 인맥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일찍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요. 24세에 혁명군 포병 대위로 툴룽항 싸움에서 공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26세의 나이에 파리의 폭동을 진압하면서 장군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이탈리아 원정, 이집트 원정을 떠났고 파리로 돌아와 제1통령 이라는 지도자의 타이틀을 달았습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30세였는데요. 황제로 등극한 이후 유럽의 절반을 제패하고 교육, 종교, 문화, 법률 등 오늘날 프랑스의 초석을 남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후 러시아 원정 실패와 워털루전쟁의 패배로 나폴레옹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지만, ‘전쟁의 천재’, ‘시대의 영웅’으로 남게 됩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말로 대변되는 그는 지금까지도 프랑스의 영웅은 물론 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나폴레옹 콤플렉스

‘나폴레옹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열등감에 대한 보상 심리로 공격적이고 과장된 행동을 하는 강박 관념을 일컫는 말인데요. 앞서 언급한 듯 나폴레옹은 보잘것없는 가문의 시골뜨기였고 외모도 160cm이 채 되지 않는 단신이었습니다. 그런 강박을 이겨내고 악착같이 노력하여 황제에 자리까지 오르게 된 나폴레옹. 이에서 유래한 나폴레옹 콤플렉스는 자신이 갖는 열등감에 대한 보상 심리로 자신의 지위와 품격을 고양시키기 위해 더욱 더 분발하려는 심리 또는 매사 호전적이고 격렬하게 반응하는 심리를 의미합니다. 최근에는 나폴레옹의 키에 포커스를 맞추어 키가 작은 남자들의 열등감의 표현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웰링턴, 영국의 자존심

아서 웰즐리 웰링턴은 아일랜드 더블린 출생으로 빅토리아 시대에 수상으로 역임한적이 있는 인물입니다. 앤저스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에 임관하여 군인의 길을 걷게 되는데요. 나폴레옹이 연고도 없이 홀로 자수성가한 영웅에 속한다면 웰링턴은 귀족출신에 거만하고 고고하며 독재적인 사나이였습니다.

거만하고 독재적인 성격이었지만 뛰어난 전략가이기도 했던 그는 치밀한 계획으로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였던 ‘워털루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영국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이 후에 그는 영국의 총리로 임명되면서 정치가로서 활약하였는데요. 특유의 독재적인 군인 기질로 시민의 따가운 시선도 받았지만, 그는 카톨릭교 해방이라는 업적을 남기면서 영국을 대표하는 전략가이자 정치가로서 칭송 받고 있습니다.


웰링턴 장군의 5분

한번은 어느 고관과 런던 다리 근처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웰링턴 장군은 정시에 약속장소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고관은 5분이 지나서야 헐레벌떡 달려왔습니다. 장군은 시계를 보면서 "5분이나 늦었군."하고 불쾌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지각한 고관은 "각하! 겨우 5분밖에 늦지 않았습니다."라고 변명했습니다. 그러자 웰링턴은 "겨우 5분이라고? 그 시간 때문에 우리 군대가 패전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요? 5분의 시간이란 그렇게 중요한 것이요."라고 대꾸했습니다.
얼마 후에 웰링턴 장군이 그 고관과 또 만날 일이 생겨 시간 약속을 했습니다. 그 고관은 지난번의 일이 생각되어 5분 일찍 나와서 장군을 기다렸습니다. 시간을 맞춰 도착하는 웰링턴 장군에게 그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장한 일을 했다는 듯 말했습니다. "각하! 어떻습니까? 이번에는 제가 5분 일찍 나왔습니다." 그러자 웰링턴 장군은 이번에도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5분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군요. 5분이나 일찍 왔으니 당신은 아까운 5분을 낭비하고 만 것이지요!"

이는 시간의 소중함에 관해 이야기할 때 지금까지도 언급되는 웰링턴 장군의 에피소드입니다.  그는 이처럼 시간을 비롯해 모든 면에서 치밀했습니다.


워털루전쟁, 운명을 결정짓다

1815년 벨기에 남동부의 한적한 평원인 워털루(Waterloo)에서 유럽의 운명을 결정짓는 한판 승부가 펼쳐졌습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 7만2천명과 웰링턴이 이끄는 유럽연합군 6만8천명이 맞붙었습니다.

치밀한 전략가였던 웰링턴은 워털루 언덕을 방어거점으로 선택해 나폴레옹의 공격을 기다렸습니다. 오전 11시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시작돼 프랑스군은 공격, 영국군은 방어하는 형국으로 진행됐는데요. 오후 6시 나폴레옹은 마지막 승부수로 불패의 근위대를 출격시켰으나 이틀 전 퇴각했던 프로이센군 4만8천명이 영국군에 합류하면서 전장의 양상은 단번에 바뀌게 되었고, 이 전쟁이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가 되면서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나폴레옹의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작은 키에 가진 것도 없었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한 나폴레옹과 귀족 출신에 탄탄대로를 걸었던 웰링턴은 얼핏 너무도 달라 보이지만 한 나라를 대표하는 군인으로써 본분에 충실했고, 한 나라라는 거대한 짐을 짊어지고선 홀로 씩씩하게 나아갔던 영웅에 가까운 인물들이라는 것에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국에서는 나폴레옹과 웰링턴을 두고 영웅으로 칭송하는 시선과 독재자로 치부하는 시선이 교차되지만, 그들이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위대한 인물이라는 점에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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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4.05 22:43 dsadasd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 웰링턴이랑 나폴레옹이랑은 비교가 안됨
    2. 나폴레옹 키는 단위 측정이 잘못되서 작아진거임 실제론 당시 평균키 이상
    3.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옹이 선임 근위대를 몰살시키는 실수를 하고도 압도적이였지만 프로이센이 오기전까지
    압도적이였음

    • 2012.04.06 11:02 신고 사용자 Louisien  댓글주소  수정/삭제

      관련서적과 지식백과를 참고하여 작성한 글입니다. 역사적 사실이다보니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수 있다는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 2013.01.19 02:08 alice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폴레옹의 키는 실제로 168~170cm이 맞습니다. 영국이랑 프랑스의 단위가 달라서 생긴 오차로 영국측이 160초반이라고 선전했던게 아직까지 굳어진건데, 실제론 170정도로 봅니다. 다만 나폴레옹의 근위대가 180cm이상의 장신들로 이루어졌고 항상 나폴레옹의 곁에 있었으므로 기록화등에서보면 상대적으로 주변인물들의 키에비해 왜소해보이는 거죠.
      그리고 프러시아군이 돌아오기 직전까지 영국군이 밀렸던 것도 사실입니다. 웰링턴은 철수준비까지 했죠. 새벽부터 한나절동안의 전투로 양군이 완전히 지친 상태에서 5만의 프러시아군이 옆구리에 나타나서 패닉에 빠진 프랑스군이 무너진게 패인입니다. 웰링턴의 공적이라면 다른 장군이라면 진작 무너졌을 전선을 오후늦게까지 유지해서 프러시아군과 결국 합류할 수 있었다는 정도죠.

  2. 2013.01.02 01:27 삼봉정도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일단 워털루 전투 병력이 대략 프랑스군 12만에 영국-네덜란드 연합군 10만, 블뤼허의 프로이센 군이 12만으로 대프랑스 동맹군 병력이 압도적이었고요.

    군사학적으로 봤을때 웰링턴은 나폴레옹에 비교조차 되지 않죠.. 워털루 전투만 봤을때도 만약 프랑스 지휘관 배치에 있어서 정치적인 요소가 없었다면, 나폴레옹이 병에 걸리지 않아 제대로된 지휘를 했다면, 프랑스군이 전성기때의 프랑스군으로 구성됬다면 프랑스가 지진 않았을 겁니다.

    반면 지휘관, 병력 등 압도적인 대프랑스 동맹군은 그럼에도 전초전부터 프랑스군에 밀렸고 만약 정치적인 이유로 임명된 무능한 지휘관이 아니었고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를 할 수 있었다면 프로이센군은 진작 패퇴하고 영국-네덜란드 군은 고립되어 고전했을 겁니다.

    물론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가정을 한다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찌되었던 역사의 승자는 웰링턴과 블뤼허고 당시 대프랑스 동맹군의 가장 큰 약점인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에 대한 공포심을 극복하고 이겨낸 웰링턴과 블뤼허도 대단하죠.

    흠.. 막상 쓰고 보니 너무 딴지 건거 아닌가 싶네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웰링턴에 대해 군사학적인 요소 말고는 잘 몰랐는데 좋은 지식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5분 이야기 웰링턴의 일화였군요.

  3. 2014.02.24 19:04 1234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alice님 께서 하신 말에 추가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나폴레옹의 죽음 이후 부검을 하게 되면서 그의 키가 5.2피에 인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167.6cm로 당시 프랑스 남성의 평균 신장인164.1cm 보다 3.5cm더 큰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던것 처럼 피에는 프랑스의 도량형인데 영국에서 이를 피트 단위로 계산해 버려 5피트 2인치로 계산하게 되었는데 이는 157.48cm로 즉 번역작업의 오류로 인해 잘못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제에서 벗어난듯한 느낌이 들지만) 또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워털루 전투가 워털루에서 치뤄진것이 아니며
    플랑스 누아 마을과 몽생장 마을 사이에서 남쪽으로 4마일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워털루 전투는 블뤼허 장군의 프로이센 구원 병력은 연합군 6만 8천의 병력과 함께 웰링턴 장군을 도와 나폴레옹에게 패배를 안겨준 전투인데

    이 전투의 배경이 워털루로 잘못 알려진 이유는 웰링턴이 워털루에 작전 본부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워털루는 벨기에 브뤼셀의 남쪽에서 9마일 떨어진 근교로 격전지보다 북쪽에 위치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실상 나폴레옹이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된 주요 원인인 러시아 원정은 사실 혹독한 한파탓이 아니였다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후퇴하기 시작한 10월에 키예프의 평균 기온은 영상 10도, 바르샤바 또한 10도 이상이 였으며 레바르는 영상 6도를 조금 넘어 11월에도 강이 얼지 않을 정도 였으며 실제로 큰 추위는 그해 12월에 있었습니다. 이 원정의 패배 이유는 사실상 보급 실패로 인한것 때문인데 러시아 원정후 귀향한 병사들이 그 추위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나폴레옹은 추위탓으로 변명을 하게된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 2014.02.25 09:22 신고 사용자 Louisien  댓글주소  수정/삭제

      123456님! 좋은 정보를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루이까또즈 공식 블로그에 자주 찾아주셔서 유익한 정보를 더 많이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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