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lissa de dos dans l atelier, 2014>


프랑스 소장가를 중심으로 구성된 현대미술국제화추진회(Adiaf)가 프랑스 미술을 세계화하는데 기여한 젊은 작가들에게 주는 상인 ‘마르셀 뒤샹 상’. 올 겨울, 한국에서는 2011년 마르셀 뒤샹 상의 최종 4명의 후보에 올랐던 프랑스 작가 ‘다미앙 카반’이 첫 개인전을 엽니다. 재작년, 부산 비엔날레에 유럽을 대표하는 작가로 참여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주목 받고 있는 작가이기도 한데요. 프랑스 문화원이 후원하는 따끈따끈한 전시 소식, 지금 함께해볼까요?


■ 자신만의 감각을 캔버스 위에 채색하는 화가
 



프랑스 작가 다미앙 카반(Damien Cabanes)은 1959년, 프랑스 파리 근교에 있는 쉬렌(Suresnes)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작가 집안에서 나고 자란 다미앙 카반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며, 그의 할아버지와 함께 파리의 수많은 미술관과 갤러리의 전시들을 둘러보며 자랐다고 하는데요. 그리고 1979년, 다미앙 카반은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인 에콜-드-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하여 조각과 페인팅 작업을 공부하게 됩니다.


<tables rouge dans l atelier, 2015>


다미앙 카반이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추상시리즈’는 색이 들어간 사각형을 그린 뒤, 오랜 시간을 들여 섬세하게 사각형을 재 작업하는 과정이었습니다. 1996년, 다미앙 카반은 그의 첫 번째 구상 자화상을 완성 시켰으며, 2006년까지 이러한 작품을 꾸준히 작업해나갔는데요. 이후, 그는 석고에서 점토로 재료를 바꾸어 형태를 만들어내고 거친 코팅과 바니쉬 칠을 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작가의 손의 흔적이 보존되어 있는 불안정하고 부서지기 쉬운 조각에서, 작가는 인간의 삶에 대한 덧없음을 찾았다고 하네요.


■ 다미앙 카반의 작업실 풍경을 색다르게 만나는 전시
 



<Daniel de profile dans le studio, 2015>


다미앙 카반은 회화, 조각, 실험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작업 하는 작가입니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그의 회화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데요. 다미앙의 작업실 풍경을 그린 유화와 큰 종이 위에 과슈로 그린 파리의 풍경화 그리고 인물화 등 15여점의 작품이 전시됩니다. 이번 전시의 주제이기도 한 <PEOPLE AND THINGS>는 '고도를 기다리며'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사무엘 베케트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에서 인용한 구절이라고 합니다. 그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작업실에서 소재를 찾아, 그 안에서 만나는 인물들과 사물들을 주제로 작업한 작품들을 이번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objets fond gris, 2005>


다미앙 카반은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 공간에서 잘 아는 사람들과 사물을 그렸지만, 자신에게 회화 작업은 늘 ‘추상적’인 느낌을 준다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그는 구상과 비구상을 구분해서 그리지 않는다고 말하며, 스튜디오 배경이 어느 순간 사라지기도 하고 인물이 추상적으로 변하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덧붙여 그의 회화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철학적 사고는, 국내에서 열리는 전시에서는 쉽게 만나볼 수 없는 것이기도 했는데요. 그러한 부분이 오히려 관람객들로 하여금 더욱 신선함을 주고 있습니다.   



한국 관람객들이 그림 그 자체로 소통하는 것이 매우 인상 깊었다고 말하는 다미앙 카반. 이번 전시를 위해, 다미앙 카반은 작품 60점을 프랑스에서 공수해 왔다고 하는데요. 전시가 종료되는 2016년 2월 20일까지 작품을 정기적으로 교체하며, 그의 다양한 작품들을 관객들에게 선보일 계획이라고 합니다. 회화가 가진 묵직한 깊이감과 세련된 감각, 그리고 철학적인 사고가 어우러진 다미앙 카반의 작품이 국내에 머물러 있는 동안, 꼭 한번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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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화가, 모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습니다. 전쟁기념관에서 진행되는 <모네, 빛을 그리다 展>은 세계 최초 인상파 화가인 모네의 작품들과 IT 미디어 기법이 결합된 ‘컨버전스 아트전’으로 진행될 예정인데요. 캔버스 위에서만 볼 수 있던 그림을 첨단 IT 미디어 기술로 재해석한 색다른 전시로 더욱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 빛의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파리에서 태어난 모네는 프랑스 서북부 도시인 르아브르에서, 대표적 풍경 화가인 부댕(Eugène Louis Boudin)의 문하생으로 정식 미술 교육을 받으며 화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부댕은 모네에게 야외의 풍경을 직접 눈으로 보며 그리는 ‘외광 회화’의 개념을 알려주었는데, 바로 이 외광 회화는 그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준 표현법이 되었습니다. 1871년, 런던에서는 낭만주의 화가인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의 영향을 받아 더욱 밝은 색조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고, 귀국 후 그의 동료 화가들과 제 1회 인상파 전람회를 개최하게 됩니다. 



빛에 의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물의 인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인상파’. 당시 지극히 ‘인상파적인’ 모네의 그림에 대해 야유가 쏟아졌는데, 현재 모네를 가장 잘 나타내는 ‘인상파’라는 말도 그의 작품을 야유한 데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모네는 주로 자신의 지인들이나 알고 있는 장소들, 그의 아내, 그리고 파리의 건물이나 지베르니의 정원 등에서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렸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힘든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모네는 그의 뮤즈였던 여인 카미유(Camille Doncieux)를 모델로 밝고 따스함이 느껴지는 그림들을 꾸준히 그렸습니다.


■ 세계 최초, 모네의 작품을 컨버전스 아트로 만나다
 



국내에서 열리는 모네의 이번 전시에서 가장 특별한 점은 바로 ‘컨버전스 아트’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입니다. 예술과 IT가 결합된 독특한 이번 전시에서, 관람객들은 모네의 시선에서 그림을 체험하고, 심지어 작품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요. 모네의 작품을 고화질 영상으로 재현했기 때문에, 모네가 살았던 그 시대의 현장감과 웅장함을 느끼며 작품을 보다 밀접하게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특히,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Musee de l'Orangerie)에 전시되어 있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전시관을 재현한 모네의 <수련> 대작들은 이 전시의 가장 특별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네, 빛을 그리다 展>은 전시를 보는 것이 아직은 낯선 이들, 또는 전시에 집중하기 어려운 아이들에게도 좋은 전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예술과 IT기술이 만난 만큼, 관람객이 직접 태블릿 PC를 조작하여 작품의 밝기를 조절할 수도 있고, 모네의 그림 속의 물고기가 관람객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는 생생한 모습을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모네의 작품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루앙 대성당> 연작을 3D 매핑기법으로 재현하여, 다양한 빛에 의해 성당 벽면이 변화하는 모습을 통해 모네가 담고자 했던 시간들까지 함께 느껴볼 수 있다고 합니다.  



모네라는 화가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화가의 시선으로 작품을 즐기고 또 작품 속에 들어간 듯한 체험까지 경험할 수 있는 <모네, 빛을 그리다 展>. ‘인상주의’라는 하나의 미술사조를 만들어 낸 클로드 모네의 작품을, 기존의 평면적인 전시에서 느낄 수 없었던 예술과 디지털이 융합된 색다른 방법으로 감상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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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화풍으로 그려낸 인물화로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몽파르나스의 전설, 모딜리아니의 전시를 소개합니다.◀



나른하게 잠들어있던 감수성에, 생기 넘치는 에너지를 불어넣어 줄 프랑스 문화원이 함께하는 6월 전시, <모딜리아니, 몽파르나스의 전설>을 소개합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지만 파리의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일생 동안 만난 이들의 모습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남긴 화가, 모딜리아니. ‘몽파르나스의 전설’로 불렸던 그가 비극적인 삶 속에 피워냈던 예술의 향연, 지금 만나보겠습니다.


■ 파리의 이방인, 몽파르나스의 전설이 되다
 

 


루이까또즈에서도 소개해드린 바 있는 파리의 ‘몽파르나스(Montparnasse)’, 기억하시나요? 파리를 여행을 할 기회가 생긴다면 아마 익히 듣게 될 지명 ‘몽파르나스’는, 바로 미술가 모딜리아니가 그의 예술적 재능과 천재성을 마음껏 피워내며 미술사에 길이 남은 명작들을 탄생시킨 곳입니다. 1884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모딜리아니는, 어머니와의 여행 중 방문했던 여러 곳의 미술관에서 예술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발견하게 되는데요. 그렇게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시작한 모딜리아니는 스물 두 살이 되던 해인 1906년,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로 건너오게 됩니다.




파리로 온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와 몽파르나스에 정착하면서 자신의 예술활동을 이어갑니다. 당시 몽파르나스는 예술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재능 있는 예술가들의 창작과 교류가 활발하게 일어났던 곳으로, 특히 189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파리에서 예술가들이 가장 사랑하는 곳으로 거듭나게 되는데요. 이곳에서 모딜리아니는 키슬링, 수틴 등 파리를 주 영역으로 활동한 이른 바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의 화가들과 친분을 맺으며 영감을 얻고, 또한 그 일원으로서 누구도 규정지을 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한 회화 양식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 인물화를 통해 타인의 내면과 대화한 미술가
 



(좌) 폴 알렉상드르 박사의 초상, 1909 / (우) 폴 기욤의 초상, 1915


비록 35세라는 나이로 짧은 생애를 마감했지만, 모딜리아니는 그간 400점이 채 되지않는 유화 작품만으로 20세기 미술사의 한 획을 그었습니다. 특히 모딜리아니는 미술사의 격동기라 불린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미술시대에, 인물 중심의 회화를 집요하게 추구한 인물로 남아있는데요. 마치 당대 파리의 문화예술계 인물들의 인명사전을 보는 것처럼 화가, 조각가, 소설가뿐만 아니라, 몽파르나스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익명의 인물들까지 그의 작품들은 그의 삶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좌) 흰 옷깃의 여인, 1917 / (우) 앉아 있는 잔느 에뷔테른느, 1918


모딜리아니가 왜 그토록 인물화를 고집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분분하지만, 그가 인물화를 그리는 작업을 통해 타인의 내면세계와 교감을 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그가 그린 인물화의 가장 큰 특징인 동공 없는 눈은 인물의 내면세계로 통하는 상징이 되었고, 검은색에서 점차 터키색으로 변해간 눈 색은 그의 내면의 변화를 대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입체감이 느껴지는 얼굴과 곡선으로 마무리한 몸은 대비효과를 주면서, 그의 독창성을 잘 드러내주었는데요. 단순화된 형태와 절제된 표현은 모딜리아니의 예술의 본질을 나타내며, 미술사의 그의 이름을 깊이 남게 했습니다.



20세기 초 미술계의 아웃사이더로,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낸 모딜리아니의 전시는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6월 26일부터 10월 4일까지 만날 수 있습니다. 국내 최초의 회고전으로 마련된 이번 전시는, 전 세계 40여 공공미술관과 개인소장 진품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아 아시아 최대 규모로 진행되는데요. 짧은 생애 동안 그가 남긴 강렬한 작품들과 그 속에 깃든 모딜리아니의 예술혼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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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없었던 시절, 여성의 지위는 사회에서 한없이 낮았는데요.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과 풍조 속에서도 성별의 한계를 극복하며 왕실 화가로 활동함은 물론, 전 유럽에 엄청난 예술적 영향력을 펼친 사람이 있습니다. 로코코양식의 대표 화가이자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성 화가, 그녀의 이름은 바로 엘리자베스 비제 르브룅입니다.

동갑내기 여왕을 만나다


엘리자베스 비제는 15세의 어린 나이 때부터 전문 화가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지금으로선 그리 놀라울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당시의 시대 풍조를 본다면 파격적인 면이 없지 않은데요. 당시 여성으로서 미술계에서 할 수 있었던 건 누드모델 정도였을 만큼 여성으로서의 예술계 진출은 열악했습니다. 실제로 그녀가 활동할 당시 비제는 아름다운 외모로 인해 수많은 스캔들에 시달려야 했을 만큼 편견과의 싸움을 계속해 왔는데요. 그럼에도 불구, 전문 화가로서 입지를 굳히게 된 것은 그녀의 타고난 재능과 자기관리, 그리고 그것을 발견해준 주변의 조력자들 덕분이었습니다.


그녀가 화가로서 성장하고 자리 잡기까지의 조력자로는 아버지와 남편이 있었습니다.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였던 아버지는 어린 시절 미술교육을 통해 섬세한 표현력을 지닌 그녀의 가능성을 발굴해주었고, 본격적으로 화가로서의 입지를 넓히는 데에는 미술품 수집가로 이름이 높았던 남편의 영향력이 작용했습니다. 덕분에 전문화가로 활동을 시작하며 많은 수입을 거뒀으나 그 수입은 자신의 소유가 아닌 자신의 남편과 아버지에게 귀속되곤 했습니다. 아버지와 남편의 도움으로 작가활동을 할 수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나 지위로나 독립적일 수 없었던 것은 여성이라는 성별적 한계를 가진 엘리자베스 비제의 핸디캡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진짜 가치를 발견해주는 최고의 조력자가 등장했으니 그는 바로 엘리자베스 비제의 동갑내기 여왕, 마리 앙투아네트입니다. 명성이 자자한 궁정화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이자 젊은 나이의 엘리자베스 비제를 선택한 것은 섬세하고 예리한 시선, 그리고 내면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감각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동갑내기로서 많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아 왔던 그녀는 여왕을 진심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엘리자베스 비제가 그려낸 마리 앙투아네트의 그림 속에는 여왕의 기품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내면, 그리고 여왕 특유의 성품이 묻어나 있는데요. 한때는 그녀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왕의 모습이 권위를 떨어뜨린다며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다른 궁정화가들은 그릴 수 없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인간적인 매력을 비제는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또 다른 시작



프랑스 여왕에게 총애를 받는 그녀였기에 프랑스 혁명의 칼날 역시 그녀 앞을 피할 수는 없었는데요. 처형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엘리자베스 비제를 지키기 위해 남편은 그녀를 이탈리아로 망명시켰고 처형의 위기를 모면하게 됩니다. 망명자라는 슬픈 현실로 프랑스를 떠나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녀에게는 미술적 영향력을 세계에 끼칠 기회로 작용했습니다. 망명 6년 후 파리로 돌아오기까지 그녀는 유럽의 전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뽐내게 됩니다.


그녀의 그림 속에는 폴란드의 왕 스타니슬라스 2세, 나폴리의 캐롤린 여왕를 비롯해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거쳐가게 되는데요. 프랑스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다양한 문화를 접하는 것은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시작으로 그녀의 가치와 진가를 알릴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남편의 지지를 받아 활동을 하기는 했으나 수입에 대한 권한이 없었던 그녀는 해외 망명과 자립을 통해서 경제적인 능력을 가지게 되었고, 파리로 돌아온 이후에도 미술활동에 전념해 눈을 감게 되는 날까지 600점 이상의 초상화와 200여 점의 풍경화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로코코 양식 특유의 섬세함, 그리고 아름답고 고상한 느낌의 그림은 보기에도 우아한 감성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엘리자베스 비제 르브룅 역시 로코코 양식의 대표 화가인 만큼 그러한 섬세하고 생기 넘치는 듯한 그림이 인상적인데요. 그녀가 오늘날 우리에게 보다 더 가치있게 여겨지는 이유는 당대에 흔치 않은 여성 화가로서만이 아니라 한 사람을 진실로 이해하여 그림을 통해 묘사하기 때문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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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의 프랑스는 예술사적으로 무척 중요한 시기라고 할 만큼 예술의 황금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만큼 풍요로운 예술적 시도를 맞이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는 말일텐데요. 이렇게 다양하고 화려한 예술이 만연하던 파리에서 실험적이고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화가, 아니 예술가가 존재했습니다. 루이까또즈와 함께 만나볼 프랑스의 역사적 예술가는 바로 에드가 드가 입니다.

무희의 화가, 에드가 드가


현세에서 대중들은 에드가 드가를 흔히 '데생의 천재'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그는 그림속에 섬세하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세밀하게 표현해냈기 때문인데요. 드가의 작품들에 주로 등장했던 주인공은 발레리나로, 당시 발레리나 그림은 화가에게 경제적으로 큰 수입을 안겨주는 그림이었습니다. 부르주아 집안에서 부유하게 자라온 드가는 꼭 발레리나가 아니더라도, 상류층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레저 장르를 그림의 소재로 택했다고 하는데요. 그들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극적인 상황들은 여러 가지로 모험적 예술 성향을 보이던 드가에게는 좋은 소스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한 점은 드가의 성향에 있습니다. 그는 평소 어린이나 강아지, 꽃과 같은 식물은 물론 심지어 인간, 그 중에서도 여성을 혐오하는 미장트로프(Misan thrope)로 악명이 높았던 까닭인데요. 그렇게도 여성을 혐오하면서도, 무희의 화가라고 불릴 만큼 발레니나의 몸짓을 섬세하고 역동적으로 표현하게 된 것에는 무엇이 계기가 되었을지는 의문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서 우리는 춤을 추거나 공연을 준비 중인 발레리나와 그녀를 지켜보는 어두운 그림자의 모습을 가진 부르주아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당시 발레리나는 가난한 노동자 집안의 소녀들이 택하는 신분상승의 통로였는데요. 그 욕심과 또 상품화된 육체를 탐닉하는 타락한 부르주아의 모습이 드가의 작품 속에는 굉장히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퇴폐적으로 변질된 프랑스 예술계를 꼬집어 낸 모습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다른 편에서는 드가 자신 역시 그러한 상품화된 육체를 구경하고 즐기는 부르주아 중의 한 명일 뿐이라는 평 역시 공존을 하는데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갔던 그였기에 그러한 구설수가 생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사진, 그 찰나를 찾아내다


19세기 인상주의 화가 중에서도 에드가 드가가 가장 부각되는 이유는 예술적 도구로 사용되지 않았던 다양한 기법을 시도했다는 점 때문일 것입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카메라와 사진입니다. 드가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특징처럼 다양하고 화려한 색채를 이용해서 빛에 의한 발색을 면밀하게 표현해내면서도, 동시에 카메라를 이용해서 발견한 다양한 구도와 동적인 느낌을 포착해내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예술세계를 보여줍니다. 19세기 프랑스 파리가 예술사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카메라를 예술 기법으로 활용하는 것은 극히 드물었고, 그만큼 드가의 시도는 가히 혁신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획득한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섬세하면서도 역동적인 몸짓, 짧은 찰나를 통한 표현의 확장, 그리고 사진 속 빛에 의해 연출되는 흑백의 대비를 통해 또 다른 느낌을 담아낼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사진을 통해 전달된 느낌을 그림으로 승화시키기도 했는데요. 사진을 통해서 동적이면서도 극적인 느낌을 관찰해내고 포착하여 그림으로서 승화시키는 등의 작업은 드가의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드가는 편중됨 없이 다양하고 확장된 시야의 예술관과는 다르게, 세계 대전 당시 반 유태주의 노선을 택하며 유태인이었던 동료에게 등을 돌리는 등 냉정하고 차가운 모습의 양면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요. 예술에는 누구보다도 관대했지만 그 외에 것에는 완강하고 단호하게 구분을 지어 마치 이중인격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1917년 83세의 나이로 숨진 이후 현재까지 그의 작품은 높은 명성을 자랑하면서 동시에 작품 속에서 묻어나는 성실함과 천재성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데요. 예술에 있어서 만큼은 진정성 있는 접근과 다양한 실험적 모험을 보여주었고 예술계가 성장하는 계기와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이 오늘날 드가의 명성을 존재케 하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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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개봉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등장하는 고갱은 수많은 예술가가 각각의 꽃을 피우던 19세기 후반을 공허하고 상상력이 결여된 시대로 평가하며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르네상스를 동경하는 모습을 비칩니다. 어쩌면 고갱은 그러한 이유로 실제 삶에서 유럽이라는 현실적 공간을 탈피하여 여행과 방랑을 반복하며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지도 모릅니다.

불우했고, 삶의 마지막도 초라했지만, 방랑객의 삶을 통해 얻어진 화려하고 강렬한 열대 색감의 작품들은 오늘날 고갱의 명성을 존재케 합니다. 1848년 프랑스 파리 출신의 후기인상파 화가. 고집스러우면서도 개성 있는 예술세계를 구축하며 20세기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 고갱의 라이프스토리를 작품 속에서 만나보실까요?

고갱, 그리고 고흐


미술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고흐와 고갱의 우정은 많은 이들에게 유명한 일화로 각인되어있는데요. 고갱에 대한 지독한 우정과 애증으로 인해 자신의 귀를 자르며 자해하기에 이르는 고흐와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결별하게 되는 과정까지. 비극적인 결말이 불가피했으나 둘의 특별한 우정은 서로의 예술성에 큰 영향력을 미치며 진정한 예술가로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합니다.



왼쪽 그림은 고흐와 함께한 시간 동안 그린 작품으로 고갱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황색 그리스도>입니다. 농촌의 수확과 결실의 과정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순환으로 해석해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고갱이 고흐와 함께 브르타뉴에 거주하면서 그 지역 농민들의 생활을 주의 깊게 관찰한 결과 도출된 예술적 해석으로 탄생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독자적인 생각과 해석을 통한 작품성을 나타내어 초기작 중에서도 대표적인 작품으로 중요하게 거론됩니다.


문명을 떠난, 원시적 삶에 대한 동경


위의 그림은 고갱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사신이 지켜본다>입니다. 타히티 여성의 성적 개방성과 자유로움을 관능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한데요. 북유럽 출신의 페미니스트였던 자신의 와이프와는 정반대의 여성들로 가득했던 타히티는 계산적이지 않고 문명에서 한발 빗겨나 누리는 자유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고갱은 프랑스인 아버지를 심장병으로 일찍 잃고 난 후 페루인 어머니의 손에서 양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어머니가 가진 잉카민족성의 영향 때문인지 고갱은 어릴 적부터 원시적이고 이국적인 것을 사랑했고 어린 시절부터 잦은 이동과 여행을 해온 터라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모험이 가득한 곳에 대한 환상이 가득했습니다.

어렵고 고통스럽게 작품 활동을 이어오며 고갱은 인정에 인색하고 비평이 즐비한 파리에서의 삶에 대해 환멸을 느낀 것으로 보입니다. 고갱이 생각하기에 파리는 창조적이고 개성 있는 그의 작품세계를 인정받기에는 너무나도 고리타분하다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타히티라는 원시적 공간은 단순히 고갱의 환상을 충족시키는 개념을 뛰어넘어 예술적 안식처의 역할을 띄고 있습니다.
 

죽음을 결심하며 그린 대작, 그리고 1,000프랑


고갱이 그린 그림 중 최고의 대작으로 손꼽히고 또 고갱 역시 최고라 자평했던 작품인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철학적 경지에 다다른 그의 작품 속에서는 인간이 겪게 되는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사상이 농축되어 있어서 삶에 대한 초월적 모습을 나타냅니다.

“저의 발목을 잡는 것은 오직 그림뿐입니다.”


타히티라는 공간은 독립적인 작품세계를 펼치기에 충분한 곳이었으나 현실적인 문제에 있어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고갱은 점차 문명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지리멸렬함을 느끼기에 이릅니다. 이윽고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길을 택하기 전 마지막으로 죽을 힘을 다해 그려내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그에게 떨어진 금액은 고작 1,000프랑. 그것도 모두 8점의 작품을 판 품값이었습니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속 고갱이 르네상스에 대한 동경의 뜻을 밝힌 대사가 실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건, 혹은 우디 앨런이 가상으로 그의 마음을 심증 하여 반영한 것이건, 새로운 문화에 대한 개방적 풍토가 메마른 당시의 상황과 자신의 작품성에 대해 큰 인정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답답한 마음을 우리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습니다.

고갱의 작품은 현재 누구나 한 번쯤 만나보고 싶은 작품 중 하나로 꼽히고 있고, 국내에서도 관람기회가 제공될 예정이라 큰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20세기 이후에 이르러 고갱의 예술세계가 진정한 빛을 발하게 된 것은 고갱 스스로 가지고 있던 자신의 작품에 대한 긍지의 결실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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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인상 깊게 감상했던 미술작품이 있으신가요? 풍경화나, 역사화 등 다양한 그림들을 기억하실 텐데요. 다양한 미술작품 중에서도 초상화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풍경이나 산수화가 그려지기 전부터 일찌감치 그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초상화는 풍속이나 역사를 위한 연구자료로 높은 가치를 자랑하고 있는데요. 루이까또즈는 프랑스에서도 독특한 화풍을 가진 수많은 화가와 그들이 남긴 초상화, 그리고 작품 속의 숨겨진 가치와 미학을 함께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왕실의 권위를 그리다 – 이아생트 리고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로 프랑스의 절대왕정 시대를 이끈 태양왕 루이 14세의 초상화와 이아생트 리고의 자화상 입니다. 특히 저 초상화는 루이 14세 스스로 만족하여 선물하려다가 본인이 직접 소장한 작품으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작품 속에서 비치는 루이 14세의 위압적이고 당당한 모습은 유럽의 절대 군주이자 최고의 권력자라는 것을 대신 말해주고 있는데요. 화려한 치장과 함께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권위적 눈빛이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이아생트 리고 라는 이름이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이름일 수 있지만, 당대 유럽 왕족들과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소문이 자자한 유명 화가였습니다. 그가 그려낸 것은 그저 있는 그대로를 묘사해낸 초상화가 아니라, 인물이 가진 권위와 권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강렬하면서도 중후한 느낌을 주는 색채와 명암을 도입하여 바로크 회화의 문을 열었던 이아생트 리고는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으며 부와 명예를 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서정적으로 표현된 프랑스의 서민들 – 장 바티스트 그뢰즈


위의 왼쪽 그림은 프랑스 로코코 풍 대표 화가 장 바티스트 그뢰즈의 작품 중에서도 주로 거론되는 “실 감는 소녀”라는 작품입니다. 노동을 감내하는 순간을 아름답다 못해 숭고한 이미지로 포착했는데요. 노동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프랑스 서민들의 모습을 아름답고 고급스럽게 표현하여 고단함과 애환보다는 감상적이고 행복한 느낌을 줍니다. 장 바티스트 그뢰즈는 특히 의상이나 실크, 레이스와 같은 아주 세밀한 질감을 훌륭하게 표현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생활화가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루이 15세 시기에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장식미술 사조인 로코코 풍은 아름답고 화려한 느낌의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로코코 풍 그림 속에는 귀족들이 등장하는데요. 하지만 장 바티스트 그뢰즈는 프랑스 서민들의 생활을 표현하는 것에 주력을 두어 기존의 로코코 풍 화가들과는 독자적인 성향을 나타냅니다. 서민들의 삶을 아름답고 음유 적으로 표현하여 예술사적인 면에서 그 의미가 무척 크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초상화 속에 자연스러움을 담아내다 – 오귀스트 르누아르


위의 그림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프랑스 화가 르누아르의 작품 중 <뱃놀이에서의 점심>입니다. 우리에게 르누아르 작품은 대체로 풍경화가 익숙하지만 사실 초상화를 많이 그렸던 화가입니다. 여느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르누아르 역시  주로 야외에서 작품활동을 했고 초상화를 그릴 때도 동료나 가족 등 가까운 사람을 모델로 삼아 초상화를 그리곤 했습니다. 르누아르의 작품 속에는 상류층의 풍류 등이 자주 등장하지만 실제 그의 삶은 가난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풍류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지만 초상화만큼은 자신에게 가장 가깝고 익숙한 모델을 택하여 자신의 삶의 일부분을 진정성있게 그려냈습니다.



르누아르는 초상화를 그릴 때 주로 자신의 가족, 특히 첫째 아들 클로드를 모델로 삼곤 했습니다. 연출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아이의 천진난만함을 그의 그림 속에 표현한 것입니다. 아이를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구도는 자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시야가 고스란히 화폭에 담겨있어 르누아르의 마음을 그림 속에서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초상화를 접할 기회가 드문 것 같습니다. 과거처럼 특별한 목적을 가지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제 접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인데요. 그럼에도 초상화가 현대까지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이유는, 사실을 전달하는 기술 때문이 아니라 사실을 전하는 작가의 시야와 감성이 더욱 중요하게 부각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화가만의 개성과 창조성, 그리고 감성이 초상화 속에 녹아들어 있기에 우리에게 더 진실보다 더 큰 진심을 느끼게 하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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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3.03 13:42 꼬꼬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르누아르에게는 딸이없었어요 저아이는 아들이에요
    아들을 여장해서 키운거랍니다
    프랑스의 관습때문에요
    ~~

사소한 취향을 다투는 친구에서부터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커리어까지 우리는 누군가와 라이벌관계에 놓여지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는 창의력이 무기인 예술의 세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현대의 우리들에게 거장으로 꼽히는 드높은 명성의 예술가들도 예외일수는 없습니다. 오늘 소개될 라이벌의 주인공은 돈독한 사제지간이 질투와 야망으로 인해 라이벌로 변모한 20세기 미술계의 거장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입니다.


화려한 색채, 앙리 마티스

<붉은 실내>


피카소와 더불어 20세기 거장으로 꼽히는 앙리 마티스 1869년 프랑스 북부 노르파드칼레의 르샤토캄프레시스에서 출생했습니다. 법률을 배우러 파리로 유학을 왔다가 병으로 입원했던 병실에서 가끔 그림을 그리는 옆 사람을 보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그를 화가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이때가 그의 나이 스물 한살이였죠. 당시 화가들은 사물을 정확하게 그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에 비해, 마티스는 ‘진짜처럼 보이는 그림’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주전자 그림을 보고 “와, 진짜 같아!”라는 탄성보다 “녹색 주전자 속에 푸른 숲이 담겨 있는 것 같아”라고 마음으로 느껴주길 바랬죠. 이런 그의 고집은 나무는 녹색, 바다는 파란색, 등 규범화 된 색을 과감히 이탈했고, 어울리지 않는 컬러들의 조합을 선보였습니다. 그는 ‘색채를 해방시킨 화가’ 로서 ‘야수파 화가’의 선동자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형식과 시대를 넘어선, 파블로 피카소

<지중해의 풍경>


미술에 문외한이라 할지라도 피카소의 이름은 모르는 이가 없죠. 파블로 피카소는 20세기 거장 중에 거장으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합니다. 그는 1881년 스페인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화가인데요. 15세에 이미 화가로 데뷔할 정도의 천재성을 보인 그는 나이제한에도 불구하고 마드리드의 왕립미술학교에 조기 입학했습니다. 19살이 되던 해에는 ‘학교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서’ 프랑스 파리로 건너와 유학생활을 시작하게 되죠. 친구의 죽음, 가난, 굶주림으로 그에게 가장 암울했던 ‘청색시대’와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 황홀했던 ‘장밋빛시대’를 거쳐 1907년 <아비뇽의 처녀들>을 시작으로 비로소 그만의 회화 법을 선보이게 됩니다. 이 때부터 피카소는 ‘천재화가’라는 타이틀과 함께 형식을 파괴하고 시대를 초월한 입체파 화가로써 입지를 굳히게 됩니다. 

<아비뇽의 처녀들>


거장과 천재화가, 끈끈한 사제지간

어릴 적 부 터 천재화가로 불리며 이미 15살에 화가가 된 스페인출신의 피카소는 부푼 꿈을 안고 찾은 예술의 본고지, 프랑스 파리에서 작품을 전시하게 되었습니다. 천재성을 인정받으며 조기 입학까지 불사했던 그였지만, 고향에서와는 달리 아무도 전시장을 찾는 굴욕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 때 차가운 냉대에 낙심하던 피카소의 그림을 알아준 단 한 사람이 있었는데요.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분명 천재적인 화가”라고 평해준 사람은 다름아닌 앙리 마티스 였습니다. 앙리 마티스는 이미 독자적인 화법을 선보이며 그 당시 미술계의 거장으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부터 피카소는 자기를 인정해 준 마티스를 멘토로 인정하면서 돈독한 사제지간으로 각별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냉정과 열정 사이, 질투로 얼룩진 라이벌

20세기 초 사진이 예술의 한 분야로 자리잡게 되면서 화가들은 좁아진 입지를 넓히기 위해 새로운 화법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 때 마티스는 화가의 재해석이 가미된 화법을 찾아야 한다며 ‘자신의 화법을 추종’하도록 주장했는데, 이에 피카소가 “사물의 형태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반기를 들면서 이들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미술계에서 1인자가 되고 싶은 피카소의 야망이 마티스라는 스승의 장막을 뚫고 나온 것이죠.
사실 이전부터 이 둘의 스타일은 극명하게 다른 색깔을 보였습니다. 예민하고 냉철하며 신중한 마티스에 비해 피카소는 열정적이고 직감에 의존했죠. 어쨌거나 이 시점을 계기로 둘은 대치상태에 돌입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됩니다. 마티스는 어느 것 하나도 버리지 못하는 피카소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 콜라주 작품을 쓰레기로 비하했고, 피카소는 정해진 시간에 낮잠을 자는 것조차 빼놓지 않고 계획표대로 50년 동안 빼놓지 않고 매일같이 반복해온 마티스를 경멸하며 서로를 헐뜯었죠. 이에 분노한 마티스는 ‘12살이나 어린 애송이 피카소를 다시는 보지 않겠노라’ 선언하고 그 후 10년간 단 한번도 보지 않았습니다.


서로를 향한 진실된 마음

피카소 <캘리포니아 화실>


최초로 나를 인정해준 스승, 나의 뒤를 믿고 따르는 든든한 제자의 관계에서 무려 10년간을 등을 돌린 절연의 관계가 되어버린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서로에 대한 진실한 속내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1954년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앙리 마티스는 죽음의 문턱에서 “내 그림을 피카소 그림과 함께 전시하지 말아달라. 불꽃같이 강렬하고 번득이는 그의 그림들 옆에서 내 그림들이 초라해 보이지 않게. ”라고 그를 향한 마지막 찬사를 보냈고, 피카소는 앙리마티스가 생을 마감한 후에야 “나를 괴롭혔던 마티스가 사라졌다. 나의 그림이 뼈대를 형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마티스다. 그는 나의 영원한 멘토이자 라이벌이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큰 슬픔과 자책에 빠진 피카소는 장례식장을 차마 찾지 못한 채 <캘리포니아 화실>이라는 그림을 남기는 것으로 애도를 대신했습니다. 피카소는 1973년 4월 8일 92년간의 생을 그림을 그리던 중 마감했습니다.

이름을 남긴 예술가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본의 아니게 라이벌 구도에 놓여있는 관계가 많이 있습니다. 까미유와 로댕, 고갱과 고흐, 살리에르와 모차르트…불꽃 같은 사랑이 파멸로, 끈끈한 우정이 타인으로 돌아서버린 경우도 많지만,
하나 분명한 건 서로의 열정이 식지 않도록 끊임없이 불을 지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에 이른 후에야 비로소 서로를 인정하게 된 마티스와 피카소, 이들은 라이벌임과 동시에 서로에게 든든한 동반자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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