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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궁/에펠탑/파리 에펠탑] 만국박람회의 상징적 건축물, 수정궁 vs 에펠탑

라이벌의 존재는 즐거움인 동시에 고통입니다. 자극을 통해 서로의 발전을 가져온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힘든 것이 바로 라이벌이니까요. 우리나라와 일본 관계만큼이나 대조되는 라이벌이 유럽에도 존재합니다. 바로 영국과 프랑스가 그 주인공인데요. 수세기에 걸쳐 내려온 두 나라의 관계는 시기와 질투를 넘어 상호 경쟁을 통한 많은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그 중 하나가 ‘만국 박람회’ 에서의 건축물 수정궁과 에펠탑입니다.

영국의 절대적 상징 수정궁

세계의 다양한 기술과 상품을 한자리에 모아 교류를 통해 상호 국가 발전을 이룩하자는 명분하에 열린 만국 박람회는 세계 열강들의 자존심을 겨루는 장이었는데요. 최초의 만국박람회는 1850년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 알버트 왕자가 런던에서 열리는 제 1회 대영박람회(만국 박람회) 개최를 위한 조직위원장 자리에 앉으면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조직구성에서 개최일인 1851년 5월 1일까지의 시간은 겨우 16개월 남짓으로. 체계적인 준비가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대회장 설계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데요. 개회에 입박해 정원사 출신인 j.팩스턴이 등장, 수정궁(crystal palace)을 탄생시키며 성공적인 만국박람회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수정궁의 위엄

6백명이 넘는 관람객을 맞이하며 대성황을 이룬 만국박람회의 중심엔 수정궁이 있었습니다. 출품된 공산품이나 농산품, 민속품들보다도 가장 많은 이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수정궁 그 자체였는데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거의 식별할 수 없을 만큼의 철제 이음새로 연결되어 투명하게 빛나는 유리로 장식된 이 건축물의 등장은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영국은 수정궁을 통해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위상을 만방에 떨치게 되는데요. 하지만 수정궁은 박람회가 끝난 후 해체되어 좀 더 큰 규모의 건축물로 런던 남쪽 교외의 시드엄 언덕에 재건되어 보존되다, 1936년 안타깝게 화재로 전소되어 지금은 형태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콧대 높은 자존심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걸작 에펠탑

1889년 파리의 만국 박람회에서 첫 선을 보인 에펠탑의 위용은 압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작과 달리 공사가 수월했던 것은 아니였는데요. 자국민들의 비판과 금전적인 무리가 뒤따랐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가 에펠탑을 지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영국의 수정궁을 능가하는 건축물을 만들어 내가 위해서였습니다.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한 만국박람회가 파리에서 개최됬습니다. 영국의 제 1회 만국박람회가 개최 된지 약 40여년이 흘렸지만 사람들의 기억속엔 여전히 수정궁이 자리하고 있었는데요. 때문에 파리 사람들은 만국박람회를 개최하며 수정궁보다 더 거창한 건물을 짓기를 원했습니다.
팩스톤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상징물인 수정궁은 수평형의 건물에 의해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기에 프랑스인들은 발상의 전환을 통해 높이 올라가는 방법을 선택하게 됩니다. 인공 건축물로는 세게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에펠탑을 통해, 프랑스는 그들의 과학기술과 자본능력을 전세계에 과시함과 동시에 프랑스만이 차지할 수 있는 하늘이라는 공간을 보여줌으로써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했는데요. 파리 시내 어디에서든 보이는 단 하나의 구조물 에펠탑은 현재까지 프랑스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물로서 자리하게 됩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의식에 자극제가 되었던 만국박람회는 역사 속에 길이 남을 위대한 건축물들을 탄생시켰는데요. 비록 오늘날 그 전부를 감상할 수 없어도, 이 두 상징물이 가져다 주는 예술의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건축물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